하세가와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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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세가와 기요시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이었다. 그는 1883년 후쿠이현에서 태어나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칭다오 공방전 등에 참전했다. 이후 해군성, 해군대학 교관, 주미 해군 무관, 요코스카 해군 기지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1940년에는 제18대 대만 총독에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A급 전범 혐의로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으며, 1970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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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기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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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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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주니어 서드 랭크 |
원어 이름 | 長谷川 清 |
로마자 표기 | Hasegawa Kiyoshi |
출생 | 1883년 5월 7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후쿠이현 아스와, 후쿠이시 |
사망 | 1970년 9월 2일 |
사망지 |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
별명 | 해당 없음 |
경력 | |
소속 | 대일본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903년–1945년 |
최종 계급 | 해군 대장 |
지휘 | 니신 나가토 |
참전 |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상훈 | 금치훈장 1등 욱일대수장 서보대수장 |
정치 경력 | |
직책 | 제18대 타이완 총독 |
재임 기간 | 1940년 11월 27일–1944년 12월 30일 |
이전 | 고바야시 세이조 |
이후 | 안도 리키치 |
기타 정보 | |
서명 | 해당 없음 |
2. 생애
하세가와 기요시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중일 전쟁 당시 제3함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만 총독을 지냈다.
러일 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였고,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 대장의 등 뒤에 그려진 거리 측정기 위에서 군모만 보이는 사람이 바로 하세가와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칭다오 공방전에 참여했고, 이후 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 근무하며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친분을 쌓았다.[3] 당시 미국의 대일 감정은 점차 악화되었고, 황화론도 높아져 해군 무관부에서는 도청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하세가와는 청사 내에서 일본어 사용을 금지하고 영어로만 대화하도록 해군 스태프에게 명령하며, 스스로 켕기는 점이 없음을 표명했다.
1922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일본 제국 해군 참모 본부 등 요직을 거쳤다. 1927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요코스카 해군 기지 사령관, 제3어뢰전대 사령관, 잠수함 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31년 구레 해군 공창 사령관을 맡았고, 1933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군축 회의에 참석했다. 1934년 해군 차관이 되었고, 1936년 함대 지휘를 맡아 1937년 제3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중일 전쟁 발발 초기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해군기가 미국 포함 파나이를 오폭하여 격침시키고, 육군이 영국 포함 레이디 버드를 포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도쿄 재판에서도 전범으로 기소된 중대한 사건이지만, 하세가와는 즉시 미영 양국 주재 기관에 유감의 뜻과 사죄를 전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지나 방면 함대 사령관으로서 중일 전쟁의 전쟁 책임을 물어 하세가와를 체포했지만, 이때의 대응에 감복하여 무죄로 석방했다.
1940년 대만 총독으로 부임하여 타이호쿠 제국대학 예과 과정 설립, 초등 교육 의무화 등 교육 보급에 힘썼으며, 전임 총독 고바야시 세이조의 급진적인 일본화 운동을 완화했다.[1]
1944년 12월 30일 대만 총독을 사임하고 군사참의관으로 전출되었다.[4] 1945년 2월, 군사 참의관인 하세가와는 해군 특명 전력 사열사로 임명되어 화약창·진수부·수중 수상 특공 관계를 사찰하고, 같은 해 6월 12일에 해군 전비는 사기는 높지만 물자 부족으로 미비함을 천황에게 보고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고, 해상자위대 창설에 기여했다. 1970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해군 경력
하세가와 기요시는 1883년 의사의 둘째 아들로 후쿠이현 아스와군 야시로 마을(현재의 후쿠이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해군에 입대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190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해군병학교에 입학했다. 1903년 12월 14일 173명 중 6등으로 졸업하여 사관후보생이 되었고, 순양함 마쓰시마의 승무원이 되었다.[2] 1904년 1월 4일 전함 야시마로 옮겼다.
러일 전쟁 직전에 졸업했기 때문에, 하세가와의 기수는 전쟁 이후에 재개된 통상적인 장거리 항해 훈련을 받지 못했다. 5월 23일, 전함 미카사로 옮겼다. 8월 10일 황해 해전에서 경상을 입었고, 9월 10일 소위로 임관했다.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고, 8월 5일 중위로 진급했다. 9월 11일 사세보 해군 기지에서 ''미카사''가 폭발하여 침몰했을 때 부상을 입었다. 그 후 순양함 이쓰쿠시마에 배정되어 1906년 2월 15일부터 훈련 항해를 시작했고, 8월 25일 나가사키현 사세보시로 돌아왔다. 닷새 후 ''미카사''의 재건이 완료되자 다시 합류했다. 1907년 2월 23일 구축함 ''시로타에''에 배정되었고, 1908년 9월 25일 대위로 진급했다.[2]
1909년 5월 25일 해군대학에 B반 학생으로 입학했고, 11월 24일 해군 어뢰 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5월 23일에 졸업했고, 5월 25일에는 장갑순양함 아사마에 소대장으로 배정되었으며, 6월 24일에는 가사기에 배정되었다. 10월 16일,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아카풀코를 방문하는 항해에 나섰고 1911년 3월 6일 일본으로 돌아왔다. 3월 11일 제2함대 참모로 임명되었고, 12월 1일 해군대학 어뢰 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12월 1일 해군대학에 A반 학생으로 입학했고, 1913년 12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4년 5월 27일 16명 중 2등으로 졸업하여 제2함대 제독의 부관으로 임명되기 전 잠시 구축함 ''미카즈키''를 지휘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1914년 10월 칭다오 공방전에 참여했다. 1915년 2월, 해군성 인사부에 배정되었고, 1916년 4월 1일 해군 대신이자 미래의 일본 내각총리대신인 가토 도모사부로 제독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 12월 1일, 워싱턴 D.C. 주재 일본 대사관의 보좌 해군 무관으로 배정되었고, 1년 후 중령으로 진급했다. "황화론"에 대한 반일 감정과 일반적인 정서가 여전히 높게 유지되면서, 첩보 활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대사관 직원들은 대사관 내에서 일본어 사용을 금지하고 영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개인적으로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훌륭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해군 무관으로 그의 후임자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하세가와는 1919년 3월 20일 워싱턴 주재 해군 무관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와 해군성 인사부에서 복무를 재개했다.[2]
1922년 12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고 인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11월 1일 일본 제국 해군 참모 본부에 임명되었다. 하세가와는 그의 상관인 가토 제독과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세가와는 또한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자격을 갖춘 후보자의 해군병학교 및 해군대학 입학을 허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동료 대령이자 미래의 중장인 테라시마 겐(1882-1972)과의 우정을 굳건히 했다. 그들은 하세가와가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3] 하세가와는 11월 10일 다시 워싱턴 해군 무관으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5일 일본으로 돌아왔다. 5월 1일 연안 경비함이자 전 순양함인 닛신의 지휘를 받았고, 12월 1일 나가토의 지휘를 받았다.[2]
1927년 12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고 요코스카 해군 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 9월 1일 제3어뢰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1월 30일 잠수함 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해군성 해군 정책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31년 12월 1일 구레 해군 공창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 10월 해군 참모 본부에 재임명된 하세가와는 1933년 4월부터 10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군축 회의에 참석했다. 1933년 12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1934년 5월 해군 차관이 되었다.[2]
1936년 12월, 함대의 지휘를 받았고, 1937년 10월 20일 제3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파나이 호 사건은 그가 함대 사령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발생했다. 그는 1938년 4월 25일 다시 요코스카 해군 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 12월 1일 대장으로 진급했다.[2]
2. 2. 미국 근무 및 귀국
1917년 12월 1일, 하세가와 기요시는 워싱턴 D.C. 주재 일본 대사관의 보좌 해군 무관으로 배정되었고, 1년 후 중령으로 진급했다.[2] 당시 황화론에 따른 반일 감정과 첩보 활동에 대한 우려로, 대사관 직원들은 대사관 내에서 일본어 사용이 금지되고 영어만 사용해야 했다.[2] 그러나 하세가와는 개인적으로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훌륭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2] 그는 해군 무관 후임자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2] 1919년 3월 20일 하세가와는 워싱턴 주재 해군 무관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와 해군성 인사부에서 복무를 재개했다.[2]1922년 12월 1일, 하세가와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인사부장이 되었다.[3] 이듬해 11월 1일 일본 제국 해군 참모 본부에 임명되었다.[3] 상관인 가토 제독과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3] 하세가와는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자격을 갖춘 후보자의 해군병학교 및 해군대학 입학을 선호했으며, 이는 동료 대령이자 훗날 중장이 되는 테라시마 겐(1882-1972)과의 우정을 굳건히 했다.[3] 그들은 하세가와가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3] 11월 10일 하세가와는 다시 워싱턴 해군 무관으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5일 일본으로 돌아왔다.[3]
2. 3. 해군 고위 장교
하세가와 기요시는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일본 제국 해군의 고위 장교였다. 1903년 일본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경력을 쌓았다.[2] 1905년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였고, 동해 해전에서 발트 함대와 접촉 직후의 정경을 그린 도조 킨타로 화백의 『미카사 함교의 그림』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 대장의 등 뒤에 그려진 거리 측정기 위에서 군모만 보이는 사람이 하세가와이다.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칭다오 공방전에 참여했고, 이후 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 근무하며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친분을 쌓았다.[3] 당시 미국의 대일 감정은 점차 악화되었고, 황화론도 높아졌다. 해군 무관부에서는 도청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하세가와는 청사 내에서 일본어 사용을 금지하고 영어로만 대화하도록 해군 스태프에게 명령하며, 스스로 켕기는 점이 없음을 표명했다.
1922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일본 제국 해군 참모 본부 등 요직을 거쳤다. 1927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요코스카 해군 기지 사령관, 제3어뢰전대 사령관, 잠수함 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31년 구레 해군 공창 사령관을 맡았고, 1933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군축 회의에 참석했다. 1934년 해군 차관이 되었고, 1936년 함대 지휘를 맡아 1937년 제3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중일 전쟁 발발 초기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는 해군기가 미국 포함 파나이를 오폭하여 격침시키고, 육군이 영국 포함 레이디 버드를 포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도쿄 재판에서도 전범으로 기소된 중대한 사건이지만, 하세가와는 즉시 미영 양국 주재 기관에 유감의 뜻과 사죄를 전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지나 방면 함대 사령관으로서 중일 전쟁의 전쟁 책임을 물어 하세가와를 체포했지만, 이때의 대응에 감복하여 무죄로 석방했다.
2. 4. 대만 총독
하세가와 기요시는 1940년 5월 1일에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1월 27일에는 제18대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총독은 일반적으로 은퇴한 군 장교가 맡는 자리였지만, 해군 대신 오이카와 코시로는 하세가와가 현역으로 남아 있을 것을 고집했다. 하세가와는 12월 16일 타이호쿠(타이베이)에 도착했다.[1]
새로운 총독의 공식 환영식에서 하세가와가 흥분한 나머지 하녀를 들어 무릎에 앉혔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는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1] 하세가와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타이호쿠 제국대학의 예과 과정이 설립되었고, 초등 교육 의무 교육이 강화되었다.[1] 그는 전임자 고바야시 세이조가 추진한 대만의 급진적인 일본화 운동인 황민화 운동을 완화시켰는데, 고바야시는 대만 민간 신앙을 일본의 신토로 대체하려 했다.[1] 1944년 12월 30일, 하세가와는 대만 총독 직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갔다.[1]
1944년 12월 30일, 대만 총독을 사임하고 군사 참사관으로 전출되었다. 후임 총독에는 타이완의 군사령관이었던 육군 대장 안도 리키치가 겸임하는 형태로 취임했다.[4]
2. 5. 태평양 전쟁 이후
하세가와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조각될 때 해군 차관과 함께 해군 대신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요나이 미쓰마사의 유임을 지지하여 대신에 취임하지는 않았다.[5] 1945년 6월 1일부터 일본 제국 해군의 감찰관으로 임명되어 첨단 해군 기술 연구를 수행하는 사무실을 이끌었으며, 이 사무실은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때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다른 모든 제국 해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40년 이상 복무한 후 11월 30일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5]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해군기가 미국 포함 파나이를 오폭하여 격침시킨 사건 때문에,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지나 방면 함대 사령관으로서 중일 전쟁의 전쟁 책임을 물어 하세가와를 A급 전범 혐의로 체포했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사태를 알자마자 즉시 미영 양국의 주재 기관에 유감의 뜻과 사죄를 전했고, 이때의 대응에 감복한 연합군 측은 무죄로 판단하여 1947년 1월 14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석방했다.[3] 석방 이후, 1951년 그는 전 일본 제국 해군 장교들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에 참여하여 해상자위대 창설을 감독했다.
1944년 12월 30일 타이완 총독을 사임하고 군사참의관으로 전출되었다.[4] 1945년 2월, 군사 참의관인 하세가와는 해군 특명 전력 사열사로 임명되어 화약창·진수부·수중 수상 특공 관계를 사찰하고, 같은 해 6월 12일에 해군 전비는 사기는 높지만 물자 부족으로 미비함을 천황에게 보고했다.[5]
1970년 9월 2일, 뇌출혈로 인해 도쿄도메구로구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가마쿠라 레이엔 묘지에 있다. 장례는 같은 해 9월 9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다.[6]
3. 논란 및 비판
하세가와 기요시는 중일 전쟁 발발 초기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일본 해군기가 미국 포함 '파나이'를 오폭하여 격침시키고, 일본 육군이 영국 포함 '레이디 버드'를 포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도쿄 재판에서도 전범으로 기소된 중대한 사건이지만, 하세가와는 사태를 알자마자 즉시 미영 양국의 주재 기관에 유감의 뜻과 사죄를 전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지나 방면 함대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를 체포했지만, 이때의 대응에 감복하여 하세가와를 무죄로 판단하여 석방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하자, 하세가와는 즉시 지나 파견군 수뇌와 회담하여, 발발 후 불과 2일 만에 육해군의 항공대 운용 역할 분담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의 도요 폭격은 세계 최초의 시도였지만, 하세가와의 즉단이 없었다면 실시가 늦어졌을 것이다.
1940년 타이완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관례로는 예비역으로 편입될 예정이었지만, 남진책을 추진하려던 해군은 현역 대장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하세가와를 현역으로 총독에 임명했다. 오이카와 코시로 해군 대신이 하세가와의 현역에 집착한 것은, 남진책의 중요성 외에도 해군병학교 동기인 하세가와를 현역에 남겨두고 싶은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타이완 총독 취임식 후 환영 리셉션에서 하세가와는 기분이 좋아져 시중을 들던 소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 환영에 대한 사의를 표했다. 이는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명백한 성희롱으로, 당시에도 취재진이 아연실색할 정도였다. 하세가와는 동료들과의 연회에서도 "애인이라도 만들어서 세련된 요릿집이라도 하게 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살면 최고인데"라고 속마음을 토로하여 주위를 아연실색하게 한 적도 있다.
하세가와는 타이완에서 황민화 운동 강화를 비롯해 초등 보통 교육 의무화와 타이베이 제국대학예과 설치 등 교육 보급에 힘썼고, 이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1]
3. 1. 파나이 호 사건
하세가와 기요시는 1946년 말 미국 점령 당국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파나이호 사건 당시 중국 해군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장교들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미국과 영국 장교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고, 그의 정직함이 법정을 감동시켜 무죄를 선고받았다.3. 2. 황민화 정책
하세가와 기요시는 1940년 5월 1일에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1월 27일에는 제18대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총독은 일반적으로 은퇴한 군 장교가 맡는 자리였지만, 해군 대신 오이카와 코시로는 하세가와가 현역으로 남아 있을 것을 고집했다. 하세가와는 12월 16일 타이호쿠(타이베이)에 도착했다. 그는 전임자 고바야시 세이조가 추진한 대만의 급진적인 황민화 운동을 완화시켰는데, 고바야시는 대만 민간 신앙을 일본의 신토로 대체하려 했다.[1]4. 평가
하세가와 기요시는 온후하고 마음이 넓으며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결단력이 빠르고 마음먹으면 즉시 실행하는 것이 모토였지만, 한편으로는 대화를 중시하여 적이라도 철저하게 대화를 시도했으며, 머리를 숙여 상대의 체면을 세우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 중국, 미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된 시기에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세가와에 대한 비방 중상이 거의 들리지 않는 점에서도 두터운 인망을 엿볼 수 있다.
이노우에 시게미는 역대 대부분의 해군 대장을 무위무책의 무능자로 폄하하여 혹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하세가와에 대해서는 일정한 평가를 하여 2등 대장 대우를 했다.[7]
5. 연보
- 1883년(메이지 16년) 4월 14일 - 후쿠이현아스와군샤촌(현재의 후쿠이시)에서 태어남
- 1896년(메이지 29년) 4월 1일 - 후쿠이현립 후쿠이중학교 입학
- 1899년(메이지 32년) 12월 10일 - 후쿠이현립 후쿠이중학교 4학년 중퇴
- 1900년(메이지 33년) 12월 17일 - 해군병학교 입교
- 1903년(메이지 36년) 12월 14일 - 해군병학교 졸업, 해군 소위 후보생, 2등 순양함 「마쓰시마」 승무
- 1904년(메이지 37년) 1월 4일 - 전함 「야시마」 승무
- * 5월 23일 - 전함 「미카사」 승무
- * 8월 10일 - 황해 해전에서 공무 경상
- * 9월 10일 - 해군 소위 임명
- 1905년(메이지 38년) 8월 5일 - 해군 중위 임명
- * 9월 11일 - 전함 「미카사」 폭침으로 인해 공무 중상 입원
- * 9월 23일 - 사세보 진수부 부속
- * 11월 21일 - 2등 순양함 「이쓰쿠시마」 항해사 해군 소위 후보생 지도관 부속
- 1906년(메이지 39년) 2월 15일 - 연습 함대 원양 항해 출발 방면 순항
- * 8월 25일 - 귀착
- * 8월 28일 - 사세보 진수부 부속
- * 8월 30일 - 전함 「미카사」 승무
- 1907년(메이지 40년) 2월 23일 - 3등 구축함 「시라타에」 승무
- * 9월 28일 - 제10 구축정대장 사명
- 1908년(메이지 41년) 9월 25일 - 해군 대위 임명, 제10 구축정대장
- 1909년(메이지 42년) 5월 25일 -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
- * 11월 24일 - 해군 수뢰학교 고등과 제4기 학생
- 1910년(메이지 43년) 5월 23일 - 해군 수뢰학교 고등과 수료
- * 5월 25일 - 장갑 순양함 「아사마」분대장
- * 6월 24일 - 2등 순양함 「카사기」 분대장 해군 소위 후보생 지도관
- * 10월 16일 - 연습 함대 원양 항해 출발 호놀룰루~샌프란시스코~샌 페드로~만사니요~아카풀코~파나마~아카풀코~호놀룰루 방면 순항
- 1911년(메이지 44년) 3월 6일 - 귀착
- * 3월 11일 - 제2함대참모
- * 12월 1일 - 해군 수뢰학교 교관 겸 분대장
- 1912년(메이지 45년) 5월 22일 - 겸 해군 공기학교 교관
- * 12월 1일 - 해군대학교 갑종 제12기 학생
- 1913년(다이쇼 2년) 12월 1일 - 해군 소령 임명
- 1914년(다이쇼 3년) 5월 27일 - 해군대학교 갑종 졸업 (졸업시 성적 순위 16명 중 2위)
- * 5월 28일 - 3등 구축함 「미카즈키」 구축함장
- * 8월 24일 - 제2함대 참모
- * 12월 1일 - 겸 제2함대 사령 장관 부관
- 1915년(다이쇼 4년) 2월 1일 - 해군성 출사
- * 2월 5일 - 해군성 인사국원
- 1916년(다이쇼 5년) 4월 1일 - 해군성 차석 부관 겸 해군 대신가토 도모사부로 해군 대장 비서관
- 1917년(다이쇼 6년) 12월 1일 - 미국일본 대사관 부속해군 주재 무관 보좌관
- 1918년(다이쇼 7년) 12월 1일 - 해군 중령 임명
- 1919년(다이쇼 8년) 3월 20일 - 미국 일본 대사관 부속 해군 주재 무관 보좌관
- 1920년(다이쇼 9년) 4월 1일 - 귀국
- * 6월 3일 - 제1수뢰전대 참모
- * 11월 15일 - 해군성 출사
- * 12월 1일 - 해군성 인사국원
- 1922년(다이쇼 11년) 12월 1일 - 해군 대령 임명, 해군성 인사국 제1과장
- 1923년(다이쇼 12년) 11월 1일 - 해군성 군령부 출사
- * 11월 10일 - 주 미국 일본 대사관 부속해군 주재 무관
- 1925년(다이쇼 14년) 12월 11일 - 귀국 명령
- 1926년(다이쇼 15년) 4월 15일 - 귀착
- * 5월 1일 - 1등 해방함 「닛신」함장
- * 12월 1일 - 전함 「나가토」 함장
- 1927년(쇼와 2년) 12월 1일 - 해군 소장 임명, 요코스카 진수부참모장
- 1929년(쇼와 4년) 9월 1일 - 제3수뢰전대 사령관
- * 11월 30일 - 제2잠수전대 사령관
- 1930년(쇼와 5년) 12월 1일 - 해군성 함정본부 제5부장
- 1931년(쇼와 6년) 12월 1일 - 구레 해군 공창장
- 1932년(쇼와 7년) 10월 10일 - 해군성 군령부 출사
- 1933년(쇼와 8년) 10월 22일 - 제네바 군축 회의 수행원
- * 12월 1일 - 해군 중장 임명
- 1934년(쇼와 9년) 2월 14일 - 해군 군령부 겸 해군성 출사
- * 4월 29일 - 훈1등 서보장 수여
- * 5월 10일 - 해군 차관 겸 장관 회의 의원
- 1936년(쇼와 11년) 12월 1일 - 제3함대 사령 장관
- 1937년(쇼와 12년) 10월 20일 - 중국 방면 함대 사령 장관 겸 제3함대 사령 장관
- 1938년(쇼와 13년) 4월 25일 -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 장관
- * 8월 13일 - 훈1등 욱일대수장 수여
- 1939년(쇼와 14년) 4월 1일 - 해군 대장 임명
- 1940년(쇼와 15년) 5월 1일 - 군사 참의관
- * 11월 27일 - 타이완 총독 임명
- * 12월 16일 - 부임
- 1944년(쇼와 19년) 12월 30일 - 군사 참의관
- 1945년(쇼와 20년) 겸 해군 전력 사찰사
- * 6월 1일 - 겸 고등 기술 회의 의장
- * 11월 30일 - 해군성 폐관으로 인해 예비역 편입
- 1946년(쇼와 21년) 11월 21일 - 전쟁 범죄인 혐의로 신병 수감
- 1947년(쇼와 22년) 1월 14일 - 신병 석방
- * 11월 28일 - 공직 추방의 가 지정을 받음
- 1951년(쇼와 26년) 1월 24일 - 신해군 재건 위원회 고문
- 1952년(쇼와 27년) 11월 1일 - 수교회 고문
- 1970년(쇼와 45년) 9월 2일 - 사망, 87세
:: 묘소는 가마쿠라시 가마쿠라 영원에 있다.
6. 수상
참조
[1]
논문
A Comparative Study of the Kominka Movement in Taiwan and Korea, 1937-1945
https://www.airitili[...]
2020-09-28
[2]
서적
長谷川清傳
[3]
서적
長谷川清傳
[4]
뉴스
安藤利吉台湾軍司令官が総督に
朝日新聞
1944-12-31
[5]
서적
歴代海軍大将全覧
中公新書ラクレ
[6]
뉴스
訃報欄
朝日新聞
1970-09-03
[7]
문서
[8]
간행물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9]
관보
叙任及辞令
1904-10-12
[10]
관보
叙任及辞令
1928-03-10
[11]
웹사이트
中野文庫 - 旧・金鵄勲章受章者一覧
http://www.geocities[...]
[12]
관보
叙任及辞令
1937-11-26
[13]
아시아역사자료센터
長谷川清外三十一名外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の件
[14]
간행물
家の光
産業組合中央会
193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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